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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김덕호 (16) 청지기적 삶 실천한 할아버지의 기억
    • 작성일2009/11/23 00:00
    • 조회 12,278

    나는 어린 시절 내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면서 할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했다. 가정의 불화도 문제였지만, 새벽마다 나를 깨워 글을 가르치고 혼내시며 용돈은 주지 않으면서, 남들을 돕는 일이나 교회 일에는 큰돈을 선뜻 내놓는 모습도 불만이었다.

    고등학생 때 거듭남을 체험한 뒤에야 할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모든 복의 근원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면서 재물과 재능은 단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관리하는 것으로 여기는 청지기적인 삶을 실천하신 것이었다. 또 나누면 나눌수록 마르지 않는 샘처럼 넉넉한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기억하게 됐다.

    할아버지는 9살 때 외국인 선교사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셨다. 이미 가세가 기울어 있었고 나라도 망해갈 때였다. 설상가상 형까지 잃고 어린 나이에 집안을 짊어져야 했다.

    할아버지는 독학으로 한학과 한의학을 익히셨다. 조선시대에는 한학을 공부한 유생이 일정기간 한의원에서 훈련과 교육을 받은 뒤 시험에 합격하면 의원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강대국이 들어오고 조정이 힘을 잃으면서 보건제도도 혼란해졌다. 일제는 한민족의 얼과 혼을 말살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서양의학과 일부 일본 민속의학을 지원하면서 한의사가 되는 길은 아예 막아버렸다.

    해방 이후 한의사 국가 검정고시라는 제도가 생기자 할아버지는 친구분과 함께 응시해 당당히 합격했다. 내가 경희대 한의대에 들어가 교수직을 거칠 때, 고향에 내려가게 되면 경험이 풍부한 노 한의사인 할아버지와 이론에 밝은 젊은 한학도인 나는 밤을 새워가며 토론을 벌이곤 했다.

    할아버지는 특히 불임 치료의 대가였다. 내 친구 중에도 부모가 할아버지의 약을 먹고 자기를 낳았다는 이들이 여럿 있다.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은 아주머니들이 달걀꾸러미나 참깨를 내놓으면서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리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할아버지는 동의보감에서 나오는 방법과 나름대로 개발하신 처방으로 아이가 없는 집안에 도움을 주셨다. 전국에서 영주 성곡리 산골로 찾아와 할아버지에게 불임치료를 부탁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번 돈으로 서당도 운영하고 일제에 저항하다 상처 받은 사람들도 돌봐주었다. 모교회가 아니라도 인근 교회가 어렵다는 소식이 들리면 재물을 아끼지 않으셨다.

    내가 개원을 한 뒤에도 할아버지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부인과 환자들이 많았다. 전공이 다르다고 해도 할아버지의 처방을 내려 달라고 간청하는 분들을 차마 외면하지 못해 “생명이 나고 지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린 것이니 마음 편하게 가지시라”고 당부하면서 처방을 하면 의외로 효과가 컸다. 양방의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하면 여자에게나 남자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좀처럼 아이가 안 생긴다는 가정이 많은데, 특히 이런 경우 한방 치료의 효과가 좋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할아버지가 쓰러져 계신 영주의 병원에 도착하니 한밤중이었다.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