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덕호 (15) 수련의 과정 거치며 소중한 경험 익혀
- 작성일2009/1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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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끝에 나는 내과(간계내과)를 전공으로 선택했다. 여기에는 당시 간계내과 주임 교수이자 한의대학장이셨던 김정제 교수님의 영향이 컸다. 김 교수님은 새문안교회 장로였다. 내가 한의학과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던 대학 3학년 때 김 교수님께 편지를 써서 “기독 학생으로서 한의학을 전공하는데, 동양철학적인 사고와 기독교적인 세계관 사이의 갈등, 현실적인 어려움을 어떻게 뛰어 넘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해 의견을 교환한 적도 있었다. 김 교수님은 당시에도 연세가 많았지만 강의실에서 늘 열정을 쏟으셨다. 특히 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인턴과 레지던트 시절엔, 교수님이 출근하시면 반드시 잠깐이라도 기도로 일과를 시작하는 모습을 늘 지켜보았다. 또 병실을 돌면서 환자를 살피다가도 기도가 필요한 이가 있으면 조용히 손을 잡고 기도해주시는 모습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인턴과 레지던트 시절에는 눈 코 뜰 새 없었다. 인턴 때에는 거의 병원 안에서 생활했고, 레지던트 때에는 이틀에 한 번씩 숙직을 했다. 중환자가 많으면 아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이상하게 내가 응급실 당번일 때에는 사고 환자가 많았다. 때론 환자를 업고 뛰기도 했다. 당시에는 “왜 내가 근무할 때엔 이렇게 위독한 환자가 많을까”하고 불평을 하기도 했지만, 그때 경험이 나중에 병원을 직접 운영할 때 큰 도움이 됐다. 아무리 위급하고 중대한 환자가 와도 의사는 흥분하거나 서둘러선 안 된다. 환자와 가족들을 진정시키고 필요한 조치를 신속하게 취해야 한다. 인턴과 레지던트 생활을 통해 그런 덕목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 심폐소생술을 시행할 때는 땀을 뻘뻘 흘렸다. 병원에서 숨진 분을 업고 자택으로 모셔 가기도 했다. 화난 보호자한테 멱살을 잡힌 적도 여러 번이었다. 욕설과 거친 행동을 당할 때는 한의사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자존심이 무너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조용히 돌아서서 “주님, 이 험악한 분위기를 잘 이기도록 인내를 주십시오. 보호자들이 차분한 마음을 갖도록 해 주시고 이 가정을 위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경우는 환자의 사정이 딱해 눈물을 흘리며 내 박봉까지 쪼개서 도와주기도 했다. 1982년이었다. 한의학 박사 과정 입학시험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영주에서 전화가 왔다. “덕호야, 할아버지가 쓰러지셨다. 빨리 내려오너라.” 너무도 놀랐다. 놀란 가슴을 쓸면서 순간 기도가 튀어나왔다. “주님, 할아버지에게 큰 일이 없게 해 주십시오. 할아버지를 살려주십시오.” 다음날 있을 박사 시험을 포기하고 예약된 진료와 회진을 서둘러 마쳤다. 막 구입한 중고 포니승용차를 몰고 아직 익숙하지 않은 고속도로와 죽령재를 넘었다. 운전을 하면서도 나는 “할아버지는 꼭 사셔야 한다. 나와 함께 선교와 노인 복지의 사명을 이루셔야 한다”고 되뇌었다.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