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덕호 (2) 또 다른 어머니 등장에 어린시절 방황
- 작성일2009/1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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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엄마가 2명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와 결혼하기 전에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었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영주에서도 소문난 기독교인 집안에다 할아버지는 동네 서당 훈장이 아니신가. 이런 집안의 아버지에게 2명의 아내가 있다니. 이해가 안됐다. 혼란스럽기만 했다. ‘영주 어머니’로 불린 그분은 시시때때로 찾아와 어머니더러 나가라고 소리쳤다. 때로는 험악한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집안이 뒤집어졌다. 자초지종은 여러 해 뒤에야 알게 됐다. 영주 어머니는 아버지의 첫 아내였다.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이 났다.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영주 어머니의 친가에는 만성 피부병 환자가 있었다는데, 비슷한 증상이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치료법이 개발됐지만 그때만 해도 백납 또는 백반증이나 한센병 같은 피부질환은 난치병이었다. 더구나 한의원을 하는 집안에 피부병 환자라니. 할머니는 깜짝 놀랐고 영주 어머니는 자의반 타의반 친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에 우리 어머니가 시집을 오셨고 내가 태어난 것이다. 이런 내막을 알고 난 뒤에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영주 어머니도 이해가 되었지만, 그건 뒷날의 일이었다. 당시는 앞뒤 사정도 모르는데다 사리분별도 안될 때였다. 그냥 모든 것이 할아버지 탓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앞에서 꼼짝을 못했다. 내 용돈도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에게서 받아야 했다. 그런 아버지가 때로는 불쌍했다. “나라도 열심히 돈 벌어 호강시켜 드려야지”하고 다짐하면서 혼자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할아버지와는 얼굴을 마주치기는 것도 피했다. 남들은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하고 날더러 본받으라고 했지만, 난 속으로 ‘우리 집안 꼴이 어떤지 알고나 그러세요’라며 코웃음을 쳤다. 교회를 가도 설교는 고리타분하기만 했다. 나는 날이 갈수록 비뚤어졌다.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 했다. 우리 집에서 같이 살면서 일하던 고모를 발로 걷어차거나 부지깽이로 치마를 들치곤 했다. 초등학교 앞에서 숙부님이 문방구와 기름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학교를 마치면 가끔 가게를 보곤 했다. 그럴 때면 10환 20환을 빼돌리곤 했다. 등록금을 떼어 먹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어쩌다 할아버지 책상 위에 치료비로 받은 돈이 있는 것이 눈에 띄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중학생이 됐다. 나는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시한폭탄이었다. 집에 들어가기도 싫었다.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패거리를 만들기로 약속했다가 선배들에게 뭇매를 맞기도 했다. 역 앞 대폿집에서 교복 단추를 풀고 앉은 형들을 보면 왠지 멋있어 보였다. 그 형들과 어울려 다니며 담배도 피웠다. 중학교 3학년 때쯤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집에 들어가니 영주 어머니가 어머니 앞에서 가위를 들고서 큰 소리를 치고 계셨다. 그 광경을 보고 내 눈이 뒤집어졌다. 나는 두 어머니 사이로 뛰어들면서 소리쳤다. “내가 칵 디지삐면 그만 싸울랍니껴!” 더 이상 이런 모습을 보기 싫었다. 정말 죽어버리는 게 더 편할 것 같았다. 마당에 뒹굴던 새끼줄을 집어 들고 뒷산으로 달려갔다.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