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덕호 (17) “영문 한의학 책 만들자… 세계선교 위해”
- 작성일2009/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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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병실에 들어서니 할아버지는 정신을 회복해 계셨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기도를 한 뒤, 오늘 박사과정 입학 시험을 포기하고 밤새 내려왔노라고 말씀드렸다. 자주 안부를 여쭙고 내려오지 못한 것도 사과드렸다.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내 손을 꽉 쥐었다.
“덕호야, 아직 어지러우니 침 놔주고, 할배 걱정 말고 빨리 서울로 가서 시험 치거라.”
못다한 이야기를 조용히 나누다 할아버지의 성화에 등을 떠밀려 다시 서울로 출발하려고 했다. 그때 옆 병상에 앉아 있던 분이 나를 알아보고는 치료를 부탁했다. 마침 경희의료원에서 내가 진료를 해드렸던 어르신이었다. 중풍이 재발돼 우반신이 마비된 상태로 누워계셨다. 보호자인 아들이 눈치만 보다가 나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치료해줄 수 없느냐고 했다.
“여기는 제 병원이 아니어서 주치의의 요청 없이 제가 치료를 하지는 못하게 돼 있습니다. 또 지금 급히 서울로 가야 할 사정입니다.”
보호자는 포기하지 않고 병실 문을 잠그면서 간곡히 부탁했다. 그분을 보니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 병원은 내 선배가 운영하는 곳이었고, 그때는 담당 의사가 출근하기 전이었다. 나중에 사정을 설명하기로 하고 침을 놓아 드렸다.
급히 차에 올라타니 아침 7시쯤 되었다. 죽령터널이 뚫리기 전이어서 죽령을 넘어 국도로 가야 했다. 전속력으로 차를 몰았다. 경희대 의학관에 도착하니 10시10분이었다. 시험관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허락을 해주었다. 마음의 준비도 없고 밤새 차를 몰아 지친 몸으로 시험을 치렀다. 답을 제대로 썼는지도 몽롱할 지경이었다.
“하나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중요한 편을 선택했습니다. 나머지 저편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기도하며 답안지를 냈다. 사실 당시 나는 30살의 최연소로 입학원서를 냈기에, 이번에 떨어져도 여유가 있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이기로 하니 마음이 평안했다.
열흘 뒤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합격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말씀에 늘 순종치 못한 저에게 할아버지를 만나 사랑을 표현할 기회를 주시고, 합격이라는 선물까지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나는 기도를 하며, 다시 한번 대학에서 내 사명을 다짐했다. 그것은 한의학을 통해 세계 선교를 하는 것이었다.
80년 임상교수로 발령을 받은 뒤 새벽기도 시간에 사도 바울의 선교를 묵상한 적이 있었다. 2000여년 전 바울은 교통 출판 경제 의료 등 모든 환경이 열악한 중에도 목숨을 걸고 선교를 했던 것을 깊이 묵상했다. 문득 지금은 몸으로 직접 가지 않더라도 복음의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경희대 외국인 강좌에서 강성길 교수님에 이어 한의학 강의를 맡게 되었다. 게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박사과정에도 합격하지 않았는가. 나는 결심했다.
“영문판 한의학 책자를 만들자. 세계 선교를 위해, 한의학을 위해!”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