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덕호 (12) 난지도 교회찾아 무료진료하다 봉변
- 작성일2009/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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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 저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감기 걸린 아이가 우산도 없이 갈 것이 걱정됐다.
우산을 함께 쓰고 집까지 바래다줬다. 장대비 속을 20분 동안 걸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고 문이 잠겨 있었다. 문 앞에서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이런저런 얘길 나눴다. 그 아이도 가정 문제가 많았다. 얘기를 듣고 있으니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선생님도 너랑 비슷했단다. 내가 너만 할 때 할아버지를 많이 미워했지. 난 너무 힘들어서 두 번이나 죽으려고 했을 정도였어. 하지만 미워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더라. 오히려 내가 마음속으로 용서하고 어른들이 화해하도록 애쓰니까 그게 훨씬 좋더라고. 너도 지금 부모님 때문에 많이 힘들겠지만, 어른들을 너무 많이 미워하지 말어. 나중에 네가 어른이 되면 그땐 먼저 손을 내밀고 용서해주렴. 선생님도 같이 기도할게.”
내 말을 듣던 아이는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예. 선생님. 선생님 말씀 잘 기억하겠습니다. 콜록콜록. 그런데 선생님, 저 지금 너무 추워요.”
이마를 짚어보니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급히 위생병원 응급실로 데리고 갔다. 그 아이는 나중에 친구들을 교회로 많이 데리고 왔고, 아주 착실하게 성장했다.
또 한번은 겨울밤에 한 중학생 제자가 “죽고 싶다”며 나를 찾아왔다. 부모가 이혼하게 돼 낙동강 오리알 같은 신세가 됐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사정이 딱했다. 나도 눈물이 핑 돌았다. 또 나의 과거 얘기를 해주며 함께 울었다. 마침 아르바이트로 받은 돈을 봉투째 건네주고 힘을 북돋아주었다.
하나님께서는 묘하게도 과거 나와 같은 처지의 학생들을 붙여 주셨다. 내게도 어린 시절의 아픔이 있었기에 그 아이들과 같이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또 그 고통을 극복했기에 희망과 위로를 줄 수 있었다.
그 시절 교회학교 제자 중에는 목사가 된 사람도 여럿 있다. 영락교회 부목사로 계시다 경남 창원 상남교회에 담임으로 부임한 이창교 목사님도 어린 시절 성문교회에서 똑똑하면서도 유명한 개구쟁이였다. 얼마나 감사한가. 사람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무료진료 활동도 열심히 했다. 당시 경기도 과천에 있었던 구세군 양로원과 강동구의 청암양로원을 거의 매주 방문했다. 거기서 노인복지에 눈을 떴고, 인애가병원 설립으로 이어졌다. 보육원과 교도소도 자주 찾았다.
본과 2학년 무렵 혼자 난지도를 찾아간 적도 있었다. 지금은 월드컵 경기장과 공원이 들어섰지만 당시엔 거대한 쓰레기 산에서 악취가 진동하고 파리떼가 들끓었다. 남자들은 거의 술에 취해 있었고, 아이와 여자들은 쓰레기를 뒤지고 있었다. 선배 한의사와 함께 교회를 찾아가 무료진료를 시작했다.
그날도 가랑비가 오고 있었다. 선배와 진료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안경이 벗겨져 내동댕이쳤다. “악”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만지니 벌겋게 피가 흘렀다.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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