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덕호 (9) 대학시절 주말엔 귀향, 교회신축 도와
- 작성일2009/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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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대학이 두세 달씩 휴교하기 일쑤였다. 개헌 반대, 군사정권 타도, 거기다 한의대는 한의군 장교 신설 등으로 데모가 이어졌다. 나도 예과 시절에는 개헌 반대 데모를 하다 청량리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진 적도 있었다. 내 앞에 떨어진 최루탄 때문에 고통당했던 기억도 있다.
나는 당시 정의감에 넘치는 젊은이로서 박정희 정권에 반대했지만, 소요 속에서도 그 뒤편에 꿈틀거리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한국인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찬반 양론이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살아 있는 것은 성장하고, 성장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이런 한국을 사랑하실 것이다. 분명 미래의 한국은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하고 큰 나라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 우리 사회도 40년 전인 그 때 못지않게 시끄럽다. 대립과 분열도 심각하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이 평화를 만드는 사람(Peace Maker)이 되어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고 희망을 심어줄 수 있다면, 분명 오늘의 이 고통은 훗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성장통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한의학 공부는 무척 힘들었다. 매일 쪽지 시험, 구두시험에 수시로 시험이 추가됐다. 1시간에 100쪽 씩 진도를 나가는 해부학 한 과목만 해도 1주일 내내 외우고 그리고 익혀야 했다. 새벽기도와 성경 묵상을 통해 힘과 지혜를 얻고 순간순간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따라가기가 벅찼다.
어느 날 친구 녀석이 미팅에 나를 끌고 갔다. 내 파트너는 숙대 약학과 여학생이었다. 농담을 잘하는 친구들이 분위기를 주도했다. 나는 무슨 얘길 해야 할지 몰라 머뭇머뭇하다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나도 사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좀 논다고 놀았는데, 계속 그랬다면 아마 지금 이 자리에서 좀 더 재미있는 얘길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겨울방학 때 교회 부흥회에서 기도하면서 내가 큰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그 뒤로 내 생활이 완전히 바뀌었다. 날마다 기쁨이 넘친다. 내가 한의대에 들어온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증거하고 싶은 꿈 때문이야.”
미팅에서 처음 만난 여학생에게 이런 설교를 늘어놓았으니, 내가 지금 다시 생각해도 답답하다. 상대 여학생은 한참 동안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집은 불교야. 어머니가 보살이거든. 넌 꼭 철학자 같다. 목사 같기도 하고….”
그 여학생과는 그 뒤에도 가끔 연락을 해서 만났다. 만나면 나는 늘 복음을 전했다. 그 학생은 졸업 뒤 제약회사에 다니다가 약국을 개업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힘겹게 살다가 예수를 믿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바쁜 중에도 주말에는 영주에 내려갔다. 모교회인 성곡교회가 건축을 시작했기에 토요일 하루는 교회에서 벽돌을 지고 흙을 날랐다. 주일에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예배를 드리거나 때로는 성곡교회에서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한 번은 흙짐을 지고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만든 임시 계단을 오르는데, 3층 쯤 이르렀을 때 갑자기 발이 푹 꺼졌다. 나무판자가 힘없이 내려앉으면서 몸이 획 기울어졌다. 순식간에 중심을 잃으면서 나는 허공으로 떨어졌다.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