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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김덕호 (7) 행복한 10대로 탈바꿈… 친구 전도 나서
    • 작성일2009/11/12 00:00
    • 조회 13,631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나의 하나님이 영주 어머님의 하나님도 되신다면, 그분도 공경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른들의 마음에 아픔과 상처를 꿰매 주시고 치유해 주십시오.”

    영주 어머니에게는 2명의 자식이 있었다. 내게는 이복동생이었다. 거듭남을 체험한 뒤 그 동생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하는 중에, 내가 집안의 평화를 열망하긴 했지만 평화를 만드는 이(Peace Maker)가 되려는 결단은 미처 못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평은 절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평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설교 말씀도 기억이 났다.

    방학이 끝난 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자전거를 시내로 돌렸다. 그 곳에는 영주 어머니가 외롭게 살고 계신 집이 있었다.

    무작정 페달을 밟았다. 머릿속으로는 복잡한 생각이 지나갔다. 과연 영주 어머니는 뭐라고 하실까. 우리 어머니를 그렇게도 미워하시니, 나도 쫓아내지는 않으실까. 그러면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영주 어머니를 용서한다고 말씀드리면 이해를 하실까. 아니면 내가 그동안 미워했던 것을 용서해달라고 해야 할까.

    금세 영주 어머니의 집 앞에 다다랐다. 집안에 경조사가 있을 때에나 마지못해 찾아오던 집이었다. 오늘은 그런 핑계거리도 없이 혼자 찾아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전거에서 내려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영주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굽니껴?”

    “덕혼데요.”

    “어, 덕호 왔나. 들어오니라.”

    영주 어머니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왜 왔냐고 묻지도 않으셨다. 나는 운동화를 벗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밥 아직 안 묵었쟤?”

    “예. 안 먹었니더.”

    “쪼매만 기다리래이. 밥 묵자.”

    영주 어머니는 밥상을 차려 오셨다. 소박한 밥상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별 말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늦겨울 햇살이 창문을 넘어 들어와 밥상 위에 내려앉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날 나는 용서한다느니 용서해달라느니 하는 말은 전혀 하지도 않았다. 같이 밥을 먹었을 뿐이었다. 그냥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뒤로 나는 가끔 별일 없이 그 집을 찾아가곤 했다. 그럴 때면 영주 어머니도 별 말 없이 내게 상을 차려주셨다. 영주 어머니는 내게 자신의 두 아들과 우애 있게 지내라고 당부하셨다. 그 집 동생들은 공부를 제법 잘했다. 영주 어머니에게는 두 아들이 자존심이자 자랑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새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방학 동안 큰 은혜를 체험한 나는 친구들에게 “예수를 만나 억수로 행복한 사나이가 됐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우리학교 교훈이 ‘경천애인(敬天愛人)’인데, 성경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을 경외해보자”고 일장연설을 늘어놓고는 했다.

    그 시절 친구였던 금항련은 그때 내 모습이, 까무잡잡하고 울퉁불퉁한 게 잘생긴 구석도 없는 녀석이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고 확신에 차있어 행복해보였다고 말했다. 그 친구도 나의 전도로 신앙을 갖게 됐고 지금은 장로가 되었다. 얼마나 큰 은혜인가. 서서히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나는 가업을 이어 받아 한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